메뉴 검색
노무현 현상이 ‘2002년형 반미’를 탄생시켰다 정치학자 장훈 회고록 ⑤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2025-09-15 14:28:55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태풍의 눈으로 자리해왔다. 지금부터 만으로 80년 전인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24군단 소속 선발대가 인천에 상륙한 이래로 한반도의 운명과 초강대국 미국의 영향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의 이재명 정부를 향해 3,500억 달러를 대미투자 형식으로 사실상 현금으로 토해내라고 윽박지르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반미 감정이 이제는 황혼의 나이에 다다른 86 세대를 필두로 우리 사회에서 다시금 거세게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애증의 대상이기 마련인 미국에 대한 관점이 한국 정치의 격변과 맞물러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장훈 중앙대학교 명예교수의 이야기를 통해 짚어봤다.

‘노무현 세대’는 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세대


신해철과 싸이가 무대 위에서 반미의 선봉에 선 일에는 빙상장에서 김동성의 금메달을 강탈해간 오노의 악명 높은 할리우드 액션 또한 작용했다.

공희준(이하 공) : 때마침 2002년 2월에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의 안토 오노가 할리우드 액션으로 한국의 김동성 선수로부터 쇼트트랙 종목 금메달을 치사하게 빼앗아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 때문에 반미 감정이 크게 일었습니다. 우리나라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건은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됐습니다.


장훈(이하 장) : 신효선, 심미선 두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기소된 두 미군 병사들에 대하여 2002년 11월에 미국 군사 법원은 무죄와 일부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당시 우리 여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이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에 대해 우리나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나 통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SOFA, 곧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을 신속하게 개정해야만 한다는 여론이 엄청나게 일어났습니다.


공 :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면서 그해 초겨울에 촛불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촛불 시위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분출하는 마당 역할을 현재까지 계속 맡고 있습니다.


장 : 2002년의 반미 열기는 1980년대에 대학 캠퍼스를 휩쓸던 미국 반대의 물결과는 차별화된 양상을 띠었습니다. 이를테면 NL 즉 민족해방 계열이 주도하던 80년대의 반미는 굉장히 전투적이면서도 이념 지향적이었습니다.


공 : 강대국의 횡포에 휘둘리는 약소국의 한과 설움이 짙게 반영된 반미였습니다.


장 : 2002년의 반미는 그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차례로 이룩하고, 하계 올림픽에 뒤이어 월드컵 축구대회까지 일본과 공동 개최했다는 사실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에서 비롯된 반미였습니다. 한국이 당당한 주권국가로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청년세대의 목소리가 2002년의 반미에는 강력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이념적 갈망으로서의 반미가 아닌 현실적 요구로서의 반미였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2002년까지 한국사회의 기성세대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생겨나는 문제와 갈등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습성이 몸에 체질화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에게 열광했던 새로운 청년세대는 미국을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국을 무소불위의 절대자가 아닌 국제사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독립된 주권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상대화해 바라봤습니다. ‘노무현 현상’을 만들고 띄운 젊은 세대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이즈음은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종식되는 탈냉전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극단적 냉전 논리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혹은 덜 받을 수 있었습니다.


6·25 세대는 물론이고 86 세대조차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시작해 박정희 정권을 거쳐 전두환 정권까지 이어지는 냉전적 사고의 틀에 갇혀 있었습니다. 2002년에 청년기를 맞이한 사람들은 냉전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였습니다. 노무현 현상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변화를 향한 대중의 열망과, 촛불 시위로 상징되는 새롭고 대등한 한미 관계를 향한 집단적 모색이 종합적으로 결합하면서 1980년대의 반미와는 질적으로 다른 2002년형 반미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 : ‘앙마’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던 누리꾼이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는 촛불 시위를 제일 먼저 제안하고 기획했었습니다. 그때 앙마가 촛불 시위의 조직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려고 저에게도 전화로 연락을 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1980년식 반미와 2002년 반미의 어떻게 결을 달리하는지 자세하게 분석해주신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제가 이 둘의 차이를 의인화해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1980년대식 반미의 간판격이 되는 인물은 전대협 의장 임종석과 한국외대 여학생인 임수경이었습니다. 그럼 2002년형 반미는 누구를 대뜸 연상시키느냐? 지금은 고인이 된 신해철과 나중에 초대박 히트곡 「강남 스타일」로 월드 스타로 등극한 싸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전부터 이미 유명한 인기 절정의 가수들이었습니다. 그해 열린 「엠넷 케이엠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개막 공연 무대에서 자유의 여신상으로 분장한 싸이가 미군 장갑차 모형을 머리 위로 번쩍 들자 신해철 씨가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말리던 장면이 제 뇌리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반미가 몇몇 선진적 투사들이 이끄는 거룩한 투쟁에서 셀럽들이 주도하는 대중적 트렌드로 전환됐음을 대변하는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노무현 현상에는 당사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너무나 버거운 탓에 감당하기 힘들어했던 코드들이 대거 내장된 모양새였습니다. ‘노무현도 모르는 노무현’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현상이 벌어졌냐면 미군 장갑차에 의한 한국인 여중생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촛불 시위에 정작 노무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회창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뜬금없이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여러 보수 정치인들과 대비하면 이회창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촛불 시위 현장에 자기도 촛불 들고 숟가락 얹는 대담한 역발상을 불사했으니까요. 서민들 마음에 다가간다면서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흙 묻은 오이로 먹방도 했고요. 그때 상인들이 뭐라고 반응했느냐면 흙 묻은 오이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자신들도 비위생적이라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회창이 그만큼 뻔뻔하면서도 투쟁심과 승부욕이 남다른 인물이라는 증거였습니다. 이회창 정도의 독기와 결기를 지닌 정치인이 이제는 보수 정당에서는 씨가 말랐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홍희경 (이하 홍) :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최근 이미지가 대쪽 판사로 한창 각광을 받던 시절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인상과 겹치는 측면이 있습니다.


공 : 시내버스 타고 다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포착당하는 일이 웅변하듯이 이 전 총재보다는 문 전 대행이 한 수 위로 보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카메라 맛에 맛을 들이면 그 중독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다는 점이겠지만요.


홍 : 저는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된 평의의 구체적 내용을 지나치게 자주 공개하는 행동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은 대북송금 특검의 진실


공 : 문형배 전 권한대행 정도의 권위와 지명도를 가진 인물이 아직은 사회생활을 더 할 수 있는 나이에 건강한 몸으로 법원을 나오면 다음에 할 일이 의외로 적습니다. 그러니 국민이 부르면 가야죠. 안철수도 그렇게 여의도로 갔고, 윤석열 또한 그렇게 정치권으로 갔습니다. 대선 후보 노무현에 관한 장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고 대통령 노무현에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노풍, 월드컵, 촛불 시위 세 가지 중대한 일들이 삼위일체를 이루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드디어 출범했습니다. 따라서 참여정부는 범국민적인 큰 기대를 축복처럼 안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취임하고 막상 제일 먼저 한 일이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민주당의 거센 반대 속에 통과시킨 대북송금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시중 여론은 민주당 후보로 당선돼 집권한 노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당연히 행사할 것이라고 예상했었거든요. 노 대통령이 어떤 생각으로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한나라당이 발의한 원안대로 공포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충격을 받아서 응급실로 급히 실려 갔다는 소문이 나도는 등 민주당 전통 지지층을 중심으로 민심이 무척이나 험악했습니다.


장 : 사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정치학을 연구해온 저에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이와 관련된 각종 국내외 자료와 문헌들을 적잖이 살펴봤습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이 어째서 그러한 판단과 선택을 했는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확실한 부분은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촉진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에 비밀리에 거액의 외화를 보낸 일은 미국이 굉장히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안이었다는 점입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참여정부의 대북송금 특검에 관한 연구를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공 : 학자들이 본인이 어떠한 주제에 대한 연구를 중간에 접었다는 말은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라도 보통은 잘 하지를 않습니다. 교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니 여쭤본 제가 외려 더 당황스럽습니다.


장 : 사안이 너무 복잡했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사실들에 충분히 가까이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홍 : 영구미제로 남겨놓기는 언론도 매한가지였습니다. 대북송금 특검의 막이 오른 발단은 전혀 의외의 사건이었습니다. 무기 거래상 김영환 씨가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거액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도둑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절도 당한 일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경찰서에 출입하던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가 보도한 게 세상을 뒤흔든 대붑송금 특검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공 : 판도라의 상자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열린 셈이었네요.


장 : 여러 언론인이 대북송금 사건의 진실과 전말을 추적하는 책을 냈었습니다.


홍 : 그런데도 최초의 제보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위시한 다양한 의문점들은 결국은 명쾌하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공 : 노정 단일화는 여론조사를 정치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이는 도화선이 됐습니다. 저는 대붑송금 특검이 특별검사팀이 대한민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만드는 트로이 목마와 같은 결정적 빌미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홍 : 그전에 발생한 신동아그룹의 옷 로비 의혹 사건과 조폐공사 파업 유도 의혹 사건 때도 특검이 도입된 일이 있습니다.


공 : 옷 로비 특검과 파업 유도 사건은 짤막한 일회성 해프닝 정도로 끝났습니다. 대붑송금 특검은 그것과는 판이하게 정반대로 한국 정치의 지형을 뿌리부터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장 : 대북송금 특검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은 그 일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으로 귀착됐다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공 : 교수님께서 맥을 정확히 짚어주셨습니다. 대북송금 특검과 노 대통령 탄핵이 궁극적으로 동전의 관계를 이룬 탓입니다. 청와대가 특검을 수용하면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구주류인 동교동계와 신주류인 친노계 양쪽으로 완전히 갈라지며 심각한 내홍에 휩싸였습니다. 양측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끄덩이 사건’과 ‘난닝구 사건’을 거치며 수습 불능의 지경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등 이른바 ‘천신정 트리오’가 주축이 된 신주류 인사들이 민주당을 집단적으로 뛰쳐나와 86 세대 정치인과 친노계 정치인들이 당의 양대 그룹을 형성하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노무현 대통령 또한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신당에 입당하고 맙니다.


민주당 분당은 자신들을 민주개혁진보진영으로 지칭하는 세력들에게는 1987년의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필적하는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사태였습니다. 가히 민주화 세력의 2차 대분열이었습니다. 저는 양김의 1차 분열과 친노와 비노의 2차 분열 중에서 두 번째가 그 타격과 후유증이 더 컸다고 총화하고 싶습니다. 민주당 분당이 양김의 결별과 비교해 더 크고 짙은 멍자국을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기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끄덩이 사건은 구주류 측 여성 당원이 이미경 의원의 머리채를 거세게 잡아챈 일을, 난닝구 사건은 분당에 반대하는 역시 구주류 쪽 남성 당원이 극도로 격분한 나머지 당사에서 속옷 차림으로 신주류 측 당직자들과 몸싸움을 벌인 사건을 각각 가리킨다.


장 :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공희준 컨설턴트님과 해석을 달리하고 싶습니다. 양김이 87년에 단일화하지 못한 게 역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겉모습만 관찰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계승자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무현은 DJ와 YS가 나란히 이끌어온 양김 정치의 낡은 틀을 과감하게 깨고 나온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교동계와 친노를 권력을 주고받은 상속과 피상속 관계로 인식해선 안 됩니다. ‘노무현 현상’의 에너지는 양김 더 넓게는 3김 정치 체제를 부정하면서 생성·창출되었습니다. 노무현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 김대중과 노무현의 갈라섬은 예정된 경로였습니다.


공 : 교수님께서는 DJ와 노무현의 분열, 즉 새천년민주당 분당이 인위적 결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분화였다고 복기하고 계시네요.


장 : 노무현 현상의 핵심은 반(反) 기득권 정신이었습니다, 안티(Anti) 기성질서 운동이었습니다. 양김은 오랫동안 한국 정치를 구동해온 기존 정치 문법의 주요한 기둥이자 체현자였습니다. 노무현 현상은 구정치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었으므로 노무현 세력이 동교동계와 갈라선 일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노무현 현상에 응축된 정치사회적 동력을 자신의 중요한 권력 기반으로 계속 유지·확보하려면 그는 구체제에 속하는 정치인들과 더는 한 배를 탈 수가 없었습니다. (⑥회에서 계속됨…)


관련기사
TAG
댓글
0개의 댓글

최신뉴스

정치/사회

많이 본 뉴스

메뉴 닫기

주소를 선택 후 복사하여 사용하세요.

뒤로가기 새로고침 홈으로가기 링크복사 앞으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