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메시지와 한국 언론의 추태
김어준 총수와 딴지일보에 가득한 영포티들이 출발선에서부터 영포티는 아니었다. 허나 펨붕이 이미지로 상징되는 펨코의 2030은 출발선에서부터 영포티스러운 행태를 보이고는 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국의 태평양 전쟁 패전 80주년을 총화하는 장문의 글을 내놨다.
실제로는 히로히토가 일왕에 즉위한 이후부터 연합함대의 진주만 기습에 이르는 때까지의 일본 정치 체제의 총체적 실패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정치권의 무능과 언론의 무책임, 그리고 유권자들의 무지함이 삼위일체로 결합해 군부의 폭주를 초래했다는 게 메시지의 골자였기 때문이다. 여자 아베로 불리는 다카이치 사나에가 집권할지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감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커다란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나라의 현지 내각총리대신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장문의 글을 쓰도록 추동했을 듯하다.
한마디로 명문이었다. 이 글에 한국과 중국과의 과거사와 관련된 반성이 없다고 징징대는 우리나라 언론의 모습은 그야말로 경양식집에 가서 새우젓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옛날 시골 영감탱이의 주책스러운 꼴불견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시바의 전후 결산 메시지는 일본 국내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다른 나라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면 메시지의 구조와 완결성이 완전히 어그러졌을 게 분명하다.
이웃 나라 지도자의 심오한 역사적 메시지에 간도 보지 않고 성급하게 고춧가루부터 먼저 뿌려댄 한국 언론의 추태는 어떻게 손쉽게 드러났을까? 이시바 메시지의 전문(全文)이 우리말로 신속하게 번역된 덕분이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행간에 숨은 미묘한 뉘앙스까지 맥락을 고려하며 온전하게 옮기려면 여전히 사람의 손길을 타야만 한다. 이시바의 메시지를 구글 번역기로 돌려서 읽었다면 그저 그런 통상적 기념사로 여겨졌으리라.
이시바 메시지의 전문 번역본이 올라온 곳은 하필이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인 에펨코리아, 즉 펨코였다. 필자는 중앙일간지에서 중견 기자로 근무하는 지인이 보내준 경로를 따라가 이 글을 볼 수 있었다. 전문을 보지 않았다면 나 또한 이시바의 메시지를 기성 언론의 선동대로 무턱대고 평가절하하고 말았을 터이다.
외국 소식을 자기 입맛에 맞게 곡해하는 짓은 비단 우리나라 매체들만의 특징이 아니다. 미합중국이 스페인 왕국으로부터 쿠바와 필리핀의 식민지 지배권을 탈취한 ‘미서 전쟁’의 도화선 구실을 허스트 가문이 운영하는 미국의 황색 언론이 앞장서 자임한 일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김어준은 출발선에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한국 언론이 외신을 제멋대로 가공하는 행동을 자제하게 된 데는 딴지일보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 딴지일보에 포진한 젊고 싱싱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조선일보를 위시한 수구반동 언론사들이 난도질해버린 외신의 본뜻을 거의 실시간으로 복원해낸 연유에서였다. 딴지일보로 말미암아 거듭 망신살이 뻗친 한국의 언론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편향된 논조를 거두절미한 외신으로 정당화하려는 허튼수작을 더는 자유롭게 부리지 못하게 됐음은 물론이다.
딴지일보와 에펌코리아는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언론을 표방한다. 후자는 일종의 게시판 집합소이다. 그러나 두 웹사이트 사이에는 한 가지 결정적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젊은 남성들의 압도적 참여와 호응에 힘입어 탄생·약진했다는 사실이다.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는 기득권 중년 세대가 독자층의 주축인 딴지와 아직 돈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미약한 청년들이 접속자의 주류를 점유하는 펨코를 수평적으로 비교하면 굉장히 불공정한 처사가 될 수 있다. 이는 마치 70대에 접어든 차범근과 이제 30대 중반에 들어선 손흥민을 동시에 저울에 올려놓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다. 그러므로 펨코의 비교 대상은 2025년의 딴지일보가 아닌 세기말 즈음의 딴지가 돼야 얼추 균형이 맞을 성싶다.
나는 확신을 갖고서 단언할 수 있다. 2030 시절의 딴지일보 독자들이 지금 이 순간 2030인 이른바 펨붕이들보다는 훨씬 더 선량하고 진취적이었다고.
펨코의 제일 큰 문제점은 뭐냐? 주적이 자기들 또래의 젊은 여자들이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펨붕이들은 자기 또래 젊은 여성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지는지를 주제로 신나게 떠든다. 반면, 왕년의 딴지일보는 당대 최강의 언론 권력으로 자부하던 조선일보를 타도하겠다고, 현대와 삼성 등의 내로라하는 재벌들과 맞짱을 뜨겠다고 분연히 기염을 토했다. 펨코에 만연한 순응주의와 안전 제일주의가, 현실에 대한 체념과 기존 질서와의 타협적 성향이 2000년대 즈음의 딴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30대의 김어준은 특정 세대의 특정 성별(Gender)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폭넓게 아우르는 보편적 공익을 증진하려 애썼다. 비슷한 나이었을 때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 견주어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갈라치기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젊은 남자들의 협소한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중시하고 있다.
이준석은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자기 또래의 젊은 여자들을 지질하게 주적으로 상정한 젊은 남자들을 데리고 정권을 잡겠다는 건 양떼를 이끌고 사자의 무리를 사냥하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성취 불가능한 목표인 셈이다. 필자는 이 대표를 보좌하며 개혁신당의 입과 얼굴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스스로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이대남판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한정하고 만 현상이 참으로 답답하다.
딴지일보는 그 풋풋함과 발랄함을 전부 잃고서 기득권 영포티들의 칙칙하고 을씨년스러운 아지트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상기하자. 영포티들이 태초부터 영포티는 아니었다. 세파에 찌들고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탓에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영포티로 타락했을 뿐이다. 펨코는 아예 처음부터 영포티이다. 생물학적 연령대는 2030이건만 물질주의에 대한 숭배와 경제적 실익을 향한 악착같음은 배불뚝이 중장년 아저씨들을 방불하게 한다.
펨붕이들은 항변할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나없이 욕망을 추구하는데, 우리만 왜 이상을 좇아야만 하냐고? 나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다. 일찌감치 지금부터 집요하게 실리를 따지며 본인의 이익만 챙기려 들면 나이 들어 진짜 구제불능의 괴물이 된다고. 인간이 결승선에서 괴물이 돼야지, 출발선에서 괴물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김어준 총수와 딴지일보의 개저씨들이 비록 현재는 흉측한 괴불이 되었을지언정 출발선부터 징그러운 괴물들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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