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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대② “백석은 월북 시인이 아닌 재북(在北) 시인” - 신경림과 안도현은 어떻게 백성을 사랑하고 존경했을까

공희준 편집위원

  • 기사등록 2019-03-20 16: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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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역사는 한민족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제는 분단의 상처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남한과 북한은 서로 낯설고 이질적인 사회가 되고 말았다. 북한에 대한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의 성격이 짙고, 북한이 남한에 관해 품었음직한 공포감 역시도 무지의 심연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백석 시인은 남북한이 하나의 낯익고 동질적 사회였던 시절에 문학적 전성기를 구가했다. 남북한이 다시 하나가 됐을 때의 미래상이 어떠할지 몹시 불확실한 지금, 남북한이 하나였을 때의 기억을 문학의 창을 빌려 반추해보는 일은 한반도의 재통합에 따를 수 있는 부정적 충격과 혼란을 최소화하는 유력한 방안이 될지도 모른다.

백석, 세상의 모든 지배계급에 분노하다


백석은 소외된 약자들의 눈높이에서 제국주의와 봉건질서에 이중으로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했다.

백승대 : 백석은 활동 초기에 써낸 시들에서 고향을 작품의 주제로 자주 다루었습니다. 백석 시인은 평안도 정주에 위치한 수원 백씨 집성촌에 거주했습니다. 특정한 가문의 집성촌이다 보니까 관혼상제와 같은 일들에서 전근대적 사회상이 자주 드러나기 마련이었습니다. 백석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풍속과 풍물들을 그의 시 안에 줄곧 담아냈습니다. 백석은 전근대적인 잔재와 인습으로부터 단절해야만 조선이 앞으로, 즉 현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백석이 한용운이나 이육사와는 달리 일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저항시들을 창작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에는 백석이 품었던 핍진한 역사의식과 사무친 계급성을 소홀하게 건너뛰는 측면이 있습니다.


백석은 조선왕조가 나라를 지배하던 시대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점한 시기에도 민중은 변함없이 억압과 수탈에 신음하는 현실에 착목했습니다. 민중은 그들을 다스리는 정치권력의 이념과 성격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착취와 핍박을 당해왔기 때문입니다. 일제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바뀐 게 있다면 민중의 삶을 고통스럽게 억누르고 쥐어짜는 잔인한 억압자의 숫자가, 탐욕스러운 수탈자의 머릿수가 늘어났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석의 분노는 일제 하나만을 겨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라 안팎의 모든 지배계급과 통치자들을 자신이 싸워야만 할 적(Enemy)으로 상정했습니다.


제국주의의 굴레와 봉건질서의 질곡을 시어(詩語)로 고발하다


팔원(八院)

-서행시초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妙香山行) 승합자동차(乘合自動車)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慈城)은 예서 삼백오십리(三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은 백오십리(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어디메서 삼춘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自動車)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한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車)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팔원(八院)」은 세상의 모든 불의하고 부패한 지배계급을 향한 백성의 분노가 제대로 갈무리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이 시는 백석의 시들 중에서도 인구에 널리 회자되어온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애송하는 사람들조차 팔원(八院)이 어디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잦습니다. 팔원(八院)은 평안북도 영변군 팔원면을 가리킵니다. 영변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에도 등장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근래에는 북한의 핵무기 제조시설이 들어선 곳으로도 알려져 왔습니다. 그 때문에 얼마 전에 열렸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영변이 뜨거운 화제로 떠올랐었습니다.


「팔원(八院)」은 한 어린 소녀의 기막히고 비극적인 운명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묘향산에 있다는 삼촌에게로 막 출발하려는 참입니다. 풍경 좋은 묘향산으로 놀러가려는 게 아닙니다. 묘향산의 삼촌이 소녀를 다른 곳으로 다시 팔아넘길 터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팔원면에서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계약기간이 끝난 소녀는 삼촌에 의해 자성에 있는 어느 부잣집으로 또 식모살이를 떠나게 됩니다. 소녀가 고되게 일했던 장소는 팔원면의 주재소장 집이었습니다. 소녀는 추운 겨울날 아침에마저 손이 동상에 걸릴 지경으로 찬물에 걸레를 빨아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해야만 했습니다. 소녀가 얼마나 고생을 심하게 했으면 고와야만 할 어린 소녀의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터지고 짓물러졌겠습니까?


주재소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일본 순사들이 득시글하게 있습니다. 소녀는 일본인 경찰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이번에는 돈 많은 조선인의 집으로 팔려가는 것입니다. 외세에게 국권을 침탈당한 나라의 힘없고 가난한 나이 어린 소녀에게 닥친 수난과 고초를 백석은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대단히 정밀하게 기록해놓았습니다. 남도 아니고 혈육인 삼촌 손에 의해 다시금 낯선 남의 집으로 팔려가 힘겨운 식모살이를 되풀이해야만 하는 그 극악한 형극의 인생을 백석은 낱낱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승(女僧)」 역시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착취로 인해 지독히도 불행해진 한 여인이 결국에는 출가해 비구니가 돼야 했던 기구한 사연을 백석이 나지막이 노래하는 시입니다. 백석은 봉건 조선과 제국 일본 사이에 끼인 민중의 한과 울분을 시로써 대변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승(女僧)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30여 년의 추방령도 견대낸 백석의 시 세계


백석은 월북 시인들과 나란히 작품이 해금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과 오해를 갖게끔 자꾸만 부추겨왔습니다. 백석은 38선 북쪽으로 넘어간 월북 시인이 아닙니다.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입니다. 그는 분단 후에도 고향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백석을 월북(越北) 시인이 아닌 재북(在北) 시인으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백석이 고향에 있는 상태에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허리에 임의로 38선을 그었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늘 상기해야 합니다.


단지 고향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백석은 1987년까지 무려 30년의 세월이 훌쩍 넘도록 남한의 문학사에서 완전히 추방당하고 맙니다. 있기는 있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인간이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전체가 금서로 취급된 탓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내로라하는 스타 시인들이 백석을 조용히 흠모해왔습니다. 이를테면 신경림 시인은 자신이 백석으로부터 깊고 넓게 배웠음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표함으로써 백석에게 전폭적 헌사를 기꺼이 바쳤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집 제목은 백석이 쓴 「흰 바람벽이 있어」란 시의 한 구절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백석은 냉전시대 내내 어둡고 낮고 쓸쓸한 지하감옥으로 유폐를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한국문학사를 연구하고 되돌아볼 때 절대로 빼놓을 수도, 떼어놓을 수도 없는 높고 빛나고 북적이는 봉우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저는 백석의 시선집을 펴내면서 그를 “분단을 극복한 천재시인”으로 표현하며 상찬했습니다. 왜나면 백석의 육신은 분단 이후 북한 땅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그의 영혼은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들 마음속으로 언제든지 자유롭게 날아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북한 간의 꾸준한 교류와 협력의 결실로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된다면 백석이 남과 북을 문학적으로 하나로 아우르고 이어준 소중한 인물로 확실한 역사적 재조명을 받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공희준 : 유익하면서도 감동적인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직하우스의 신간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장안의 지가를 팍팍 끌어올리는 베스트셀러가 꼭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백승대 :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끝)



덧붙이는 글

백승대 대표는 1969년에 태어났다. ‘백시나’라는 필명으로 1989년에 시집 「거리에 비가 내리면」을 발표했다. 1997년 출판사 시와사회를 세워 대표자 겸 편집자로 일했고, 현재는 도서출판 매직하우스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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