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민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서울대 특강 발언이 대기업 총수의 언어로는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삼성전자 출신 인사에게서 나왔다.
서울대에서 특별 강연하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서울대 제공
김진안 전 삼성전자 지역장은 최근 자신의 SNS에 '젠슨 황의 졸업식과 최태원 회장의 서울대 특강… 재벌 총수의 언어가 가져야 할 무게'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최 회장이 서울대 경제학부 강연에서 보인 시장 관련 발언과 태도를 문제 삼았다.
김 전 지역장은 글 첫머리에서 지난 5월 딸의 미국 대학 졸업식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연설을 직접 들은 경험을 소개했다. 세계 산업 판도를 움직이는 경영자가 청년들에게 미래 비전을 내놓는 장면이 부러우면서도 큰 울림을 줬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최 회장이 대학 강단에 올라 학생들과 시대를 논한 시도 자체는 반갑고 의미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한국 대기업 총수가 지닌 시장 영향력을 감안하면, 그날의 발언과 태도가 리더의 언어로 적절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총수는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아니다"
김 전 지역장이 가장 먼저 짚은 대목은 총수라는 자리의 성격이다. 그는 대기업 총수가 한발 물러서서 단기 시황을 논평하거나 주가 등락의 원인을 풀어주는 증권사 애널리스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최 회장의 강연은 국내 반도체 대장주가 미국발 변수와 유동성 우려로 크게 떨어진 날 열렸다. 김 전 지역장은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이 "시장이 와장창 반응한다", "롤러코스터 장세가 계속될 것", “AI에 자금이 너무 과도하게 쏠렸다”는 식의 가벼운 평가를 내놓았다고 전했다.
김 전 지역장은 "시황 분석가라면 당일 폭락 원인을 짚고 쏠림에 따른 변동성을 경고하는 것이 제 역할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십조 원의 자본과 수만 명의 임직원, 수백만 주주의 생계를 책임지는 총수의 역할은 이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리더는 시장을 관망하며 평론하는 자리가 아니라, 불확실한 파도 속에서도 기업의 본질 가치와 중장기 대응책을 제시해 주주와 시장을 안심시켜야 하는 자리"라고 밝혔다. 이어 "총수가 애널리스트의 입으로 시장 불안을 옮기는 순간, 시장은 리더의 방관을 읽는다"고 덧붙였다.
잡스·게이츠·젠슨 황… "글로벌 CEO는 주가 언급 피해"
김 전 지역장은 해외 경영자들의 대학 연설과도 견줬다. 스탠퍼드대 졸업식의 스티브 잡스, 하버드대의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 그리고 그가 직접 지켜본 젠슨 황의 연설에는 뚜렷한 공통분모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들 CEO가 그날의 주가 급락이나 단기 경제지표, 특정 정치 현안을 가볍게 꺼내지 않는다고 짚었다. 대신 자신이 겪은 실패와 도전, 인류 기술이 나아갈 방향, 청년에게 필요한 시대적 통찰과 철학을 전하는 데 무게를 둔다는 것이다.
김 전 지역장은 이들이 단기 시황이나 자사 주가 흐름을 거론해 시장 심리를 건드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 "최고경영자의 말 한마디가 지닌 공시적 무게와 시장 심리에 미치는 파장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제주포럼 발언과 엇갈린 메시지
김 전 지역장은 최 회장이 강연에서 한 "조정이 들어오면 너무 많이 올라간 만큼 너무 많이 빠지기도 한다"는 발언도 도마에 올렸다. 이 말이 시장과 주주들에게 씁쓸함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는 최 회장이 얼마 전 제주포럼 등에서 “AI 붐은 꺼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주가 상승과 자금 집중을 당연한 흐름으로 바라봤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주가가 조정에 들어서자마자 이를 과도한 쏠림 탓으로 돌렸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김 전 지역장은 "올랐을 때는 성과로 안고, 떨어졌을 때는 남 얘기하듯 롤러코스터 장세를 탓하는 태도는 주주들에게 아쉬움을 준다"고 말했다. 정제되지 않은 언행이 기업 경영의 신뢰 체계에도 흠집을 낸다는 주장이다.
"공시 신뢰·주주가치·현장 사기 흔들려"
그는 그 파장을 세 갈래로 나눠 설명했다. 첫째는 공시 신뢰의 약화다. 수백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은 시장과 맺은 엄중한 약속인데, 최 회장이 "발표하면서도 맞나 싶었다"고 돌아보는 순간 그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김 전 지역장은 이 발언으로 SK그룹이 그간 내놓은 중장기 비전과 공식 공시의 신뢰도가 옅어지고, '총수조차 확신이 부족했던 발표였나'라는 의구심을 스스로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둘째는 주주가치 보호 책무를 가볍게 여겼다는 점이다. 그는 주가 급락 당일 나온 "와장창 반응한다", "우리와 무슨 관계냐"는 식의 표현이 주주들이 겪는 고통에 비춰 볼 때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 회장이 이사회 의장으로서 시장을 진정시킬 전향적인 메시지를 내놓는 대신, 사석에서나 어울릴 법한 말투로 시황을 논평했다고 비판했다.
셋째는 현장 임직원과 산업 생태계의 사기 문제다. 그는 AI 반도체 주도권을 잡으려 밤낮없이 뛰는 임직원과 협력사 앞에서 총수가 자신이 이끄는 산업의 열기를 과도한 쏠림으로 규정하면 현장의 의욕이 꺾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머스크·저커버그 사례 들며 “CEO 말은 리스크 신호”
김 전 지역장은 CEO 발언이 시장을 흔든 해외 사례도 소개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주가가 너무 높다"는 트윗 하나로 하루 새 시가총액 17조 원을 날렸고, 상장폐지 언급으로 당국의 제재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역시 주주들의 우려를 외면한 투자 발언 이후 하루 만에 주가가 24% 폭락하는 일을 겪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김 전 지역장은 "자본시장은 CEO의 말을 소회가 아닌 기업의 리스크 신호로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그는 총수가 대학 강단에 서는 모습 자체는 바람직하다고 거듭 밝혔다. 다만 청년과 투자자들이 최 회장에게 기대한 것은 단기 주가 하락에 대한 하소연이나 제3자 입장의 시황 해설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가 꼽은 기대치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글로벌 AI 경쟁 속에서 SK라는 거함을 이끌고 어떻게 파도를 넘어설지에 대한 절제된 언어와 흔들림 없는 비전이었다.
김 전 지역장은 수백만 주주의 재산권과 수만 임직원의 땀이 걸린 거함의 선장이 '배가 너무 흔들린다'며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을 쓰는 것은 "솔직함이 아닌 경솔함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는 “'와장창' 흔들리는 시장을 탓하기 전에 총수의 언어가 먼저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그것이 대기업 총수라는 자리가 지닌 무게이자 최소한의 책무"라고 밝혔다.
최 회장, 특강서 ‘AI 시대 한국 경제 해법' 4가지 제시
한편 최 회장은 지난 5일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재학생 등 4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공지능(AI) 시대, 세계 경제 패러다임 변화와 대한민국의 비전'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최 회장이 이 학부 학생들을 만난 것은 2022년 4월 '시장의 변화, 미래의 기업' 특강 이후 약 4년 반 만이다.
최 회장은 “30년 넘게 기업을 경영하며 '변화'에 익숙하지만, 그 속도와 크기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이어 AI 시대 경제질서의 변화, 미·중 중심의 패러다임과 헤게모니, 한국 경제의 해법 등을 놓고 생각을 풀어냈다.
그는 AI 시대에는 변수가 크게 늘어 경제학의 시장원리나 전통 모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봤다. 수요와 공급 중심으로 시장을 읽던 과거와 달리 디지털 경제에서는 개별 고객과의 관계가 중시되는 등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는 진단이다.
글로벌 질서와 관련해서는 지난 30년간 미국의 소비와 중국의 제조를 축으로 유지돼 온 분업 구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한국이 미국의 투자 요구와 중국의 기술 추격이라는 이중고에 놓였다고 분석했다.
AI 산업혁명의 규모와 속도도 짚었다. 최 회장은 AI 분야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자본이 투입되는 투자 경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AI를 중심으로 여러 산업의 혁신이 동시에 일어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경제에 대해서는 "저성장, 부채증가 등으로 내부의 기초체력이 약해진 가운데 G2 패권과 AI 혁명, 자본전쟁에 의한 외부 위협까지 더해졌다"고 말했다. 개별 현안 대응만으로는 복합적인 문제를 풀기 어려운 만큼 안팎의 변화를 아우르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법으로는 사회문제 해결이 곧 경제활동이 되는 '뉴 캐피탈리즘(신 자본주의)', 지능 수출국을 지향하는 ‘AI 네이티브 국가', 한·일 경제연대를 통한 '확장 옵션',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인센티브 시스템' 등 4가지를 내놓았다.
뉴 캐피탈리즘의 사례로는 '사회적 가치'를 들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민간의 '선행'에 사회가 금전적 보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민간이 이윤을 창출해 납부한 세금으로 정부가 국방, 복지 등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구조가, 사회의 빠른 다각화와 복잡화 속에서 현재의 구조로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고 말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제시한 ‘AI 5대 층(에너지,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거대언어모델, 애플리케이션)’을 소개하면서는 “‘AI 네이티브 국가'로 가기 위해 경쟁력을 키워야 할 분야”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한국이 목소리를 낼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주문이다.
한·일 경제연대에 대해 최 회장은 "자유무역체제가 옅어지는 가운데 국내총생산(GDP) 2조 달러의 한국과 4조 달러인 일본의 경제가 묶이면 그 파급력은 단순히 3배가 아닌 그 이상 커질 것이고, 양국이 겪는 저출산, 고령화 등 사회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센티브 시스템은 고도성장기의 성장 모델을 혁신해 기업이 성장을 이어가도록 돕자는 구상이다. 그는 작은 기업이 규제를 피하려고 대기업으로 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야 한국 경제가 지속 성장하고 자본주의도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연 뒤 질의응답에서 AI 인재 육성 방향을 묻자 최 회장은 '경험'을 꼽았다. 그는 "어디서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 직접 새로운 걸 자유롭게 설계하며 경험하는 게 ‘AI 네이티브 국가'로 가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전의 시도가 실패해도 그걸 경험으로 삼고 도전을 계속하면 '시스템'이 만들어진다"고 덧붙였다.
이정민 서울대 경제학부 학부장은 "세계 AI 산업을 최전선에서 이끄는 최태원 회장의 혜안을 나누며, 학생들이 교실에서 배운 경제학 개념을 실제 경제현장에 접목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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